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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신승민
2026.04.12. 옷과책
보통의 전기는 끝마친 삶, 가능하면 성공적인 삶을 다루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기를 작성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어떠한 자격 여부를 자문해보게 만듭니다. 저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게 구술될 수 있는 삶의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제가 별볼일 없는 제 삶을 이야기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서로 다른 삶이 발화될 기회로 연결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다소 슬픈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습니다. 슬픔에도 자격이 있을까요? 사실들만 놓고 보면, 슬플 이유가 딱히 없어 보이는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즐거이 놀고 해질 무렵 헤어질 때. 저는 아직 밝은, 그러나 서서히 어둠 뒤로 물러서는 진주빛 하늘을 바라보며 울적함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9살 때의 기억인 듯합니다. 저는 이처럼 아주 멀리 떠나온 기억들을 붙잡고 있습니다. 다른 예로, 가족 모두가 쉬는 일요일 아침, 창가 햇볕을 받으며 이불을 터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든지. 저는 어쩐지 그 순간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자주 잠깁니다. 상실감이죠. 돌아가고 싶은 노스탤지어는 아닙니다. 비어 있게 된 자리를 응시하는 데서 발생하는 공허함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끔은 지금 제가 겪는 모든 일들이 지난 과거가 자신을 반복한 결과가 아닌지 묻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그 과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제가 놓인 현재 역시 밝게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슬픔의 정서가 지배적이 되다 보면, 주어진 사건, 사실들을 판단하는 관점도 부정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인지, 특히 20살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 막연한 실패의 감각이 저를 아프게 찌릅니다. 실패한 순간은 마치 제가 죽었던 순간 같고. 설령 그때의 제가 살아 있더라도,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야 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따라서 이 글쓰기는 생의 전기가 아닌, 몇몇 죽음의 기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많은 제 자신을 떠나와야 했습니다. 떠나는 일은, 적어도 제게는, 도망과 닮았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에 모든 걸 쏟아보겠노라고 다짐하고 2년이 되지 않아 학업을 중단했고. 학업을 중단할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취직한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다 번아웃을 겪고 말 없이 퇴사했습니다. 말이 없었다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말이 없었기에 그 퇴사는 도망이었다고 부를 만할까요? 1년 쉬다가, 구제 의류를 팔게 됩니다. 2년 팔다가, 책을 만들게 됩니다. 그 사이 사이에 제 관심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향했고. 그렇게 새로운 것, 제가 해보지 않은 것에 갈증을 느꼈던 이유는. 그 전까지의 실패(라고 판단되는 것)을 만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령 실패가 맞았다고 할지라도. 실패는 그런 식으로 만회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 일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선호하진 않는데요. 어쩌면 의도치 않게 글쓰기와 맺어 온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어, 한편으로는 글쓰기에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쓰기에서 지배적인 감각은, 바로 고백의 감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완전한 솔직함으로 여러분 앞에 섰다고 자신하는 것은 아니고요.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이 불투명한 고백은 어떤 종류의 고백일까요? 죄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죄의식인가요 도피는 왜 겁이 나지 않나요 독일 유학이 더 무거울거같은데. 안녕하세요. 인정. 프레드리히 헤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2009년이었나요. 이방인처럼 보였어요. 와이파이 361b 비밀번호 efccbb8004 입니다. 네. 나는 바보입니다. 네 저는 종교를 가진 시간이 일 년 남짓 있긴 했지만. 지금의 제게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 어떤 신과도 관계 맺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 슬픔, 실패의 감각 외에 또 지배적인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죄의식입니다. 저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좋은 죄인이고 싶은 것 같아요. 그것이 저를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만듭니다. 저의 죄의식이란. 제 잘못에 대한 것이고. 제 잘못은 많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만일 제가 제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을 모종의 과학적 방법으로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다면. 제가 죄의식을 느끼고 싶지 않으리라는 걸 아실 거예요. 이것은 고통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고통인 동시에. 누구에게도 말로 적확히 설명할 수 없는 사적인 고통이기도 합니다. 네. 존재 자체가 잘못된 듯한 감각이 모두에게 낯선 것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잘 해나갈지에 대한 생각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하는 편입니다. 여러분 소중한 이야기 듣다 보니 그냥 제가 설계가 조금 잘못된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그래요. 어떻게 보면 제가 내린 선택과 변경들이. 급진적인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때도 있습니다. 차분히 들여다 보면. 지금 머무는 곳이 겁이 나서 다른 곳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머무는 게 더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요. 머문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겠죠? 특정 공간에, 큰 변화 없이 자리를 지킨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물리적인 공간과 별개로. 아마도 우리 모두 자기 자신과 맺는 내적인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비난인줄 몰랐어요. 자기 자신이 불편하면, 머물든 떠나든 불편한 건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아무튼, 저는 제 불편을 토로하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있긴 하지만요. 목적이 있었다면. 삶의 이야기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구분해보고 싶었습니다. 제 삶 이야기는 흥미롭지 않습니다. 제 안에만 머물러도 충분하고요. 간혹 어떤 이야기가 꺼내어지면. 그것은 이야기 이상이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어떤 삶 이야기나 전기든지. 우리에게 삶에 '관해' 무언가 알려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삶은 앎의 대상이 아니죠. 이 실패의 감각으로부터. 저는 새로운 성공의 자신이나 낙관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실패의 감각이 낫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지난 시간들이 실패한 작품들로 비춰질 때, 저는 그것을 달리 보는 관점을 찾아나서야 할까요? 아니면. 아니요. 저는 달리 해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방향을 시도해보고 있어요. 물론 제가 겪는 가장 큰 고충은.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들이 기억날 때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지 않을 수 있나요? 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기억의 차원이 아닌, 문제의 차원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떤 것을 기억하거나 생각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벗어던지는 게 해결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됐을 때를 해결이라고 간주해보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제가 제 자신을 하나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자체로 긍정도, 부정도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학 문제처럼요. 잠깐 이야기를 전환하면. 제 자신 바깥에, 제가 해결하고자 하는, 그러나 저로 인한 것은 아닌 문제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그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이 작은 출판사를 시작한 것 같아요. 저는 제 자신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제 동료들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은 무엇보다 쉽길 바랍니다. 하지만 제도가 좁고 두터울수록, 그 인정은 요원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기도 해요. 저는 다른 나라에 가서도 책을 만들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책이 제 자신만을 위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유학 도 아님. 베를린 도피 유학 반대 다른제도를 또 만날텐데요. 그냥 너무 킹받아요. 사실은 응원해요, 비난해서 미안해요. 찾고싶나요? 네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게 생각생각하지 않는 생각을 하다보면은 어느순간 기억이 나지않아요. “뻔한 것은 뻔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 이유로 뻔한 것은 뻔하지 않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뻔한 것들은 다른 삶들 안에서 제각기 독특한 모양새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듣는 것은 언제나 전형성의 독특한 배치”로, “그래서 뻔한 것을 뻔하게 만드는 바로 그 과정들을 우리는 뜯어봐야 한다” 안희제의 『증명과 변명』. 기억하고 싶은 게 기억나지 않을 때는요 애착인형이군요. 뭐야 유학이었나요. 제것포함 백만한 개. 슬플 때마다 스쿼트 백 개. 머무는 건 편안하지 않나요. 사랑꾼 신승민. 기억하지 않을수는 없지만, 기억이 나도 힘들어하는 정도가 적어지는것 같아요. 겁이 많아 슬픈 우리. 그냥 신승민 비난하고 싶음. 감기같은거죠. : ((--) ( - ) (-) (-) (-)(-)()(-)) (-) (-) (-)(. 물음표 백만개 날리고 싶어요. 잘못중독자?. ಃ ಃ ಃ ಃ ಃ. 해결될수있는 문제인가요. 그래서 가나요? 잘못 안 하면 되잖아요. 왜 자꾸 잘못하고 죄의식을 느껴요, 죄의식 느끼고 싶어서 잘못하는 거 아님?. 당신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 문제가 독일에서 해결 가능한 문제인가요. <> 누구에 대한 죄의식인거예요? 고백을 하고싶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불투명해요. 왜 슬퍼요. ?.ㅏ.▋ ▋ ▋ ▋ . 않 왜 책을 만드는 일로부턴 떠나지 않나요? 책=나(자아)? 책=나(아주 가끔?). 나이되 나는 아닌 나 = 책? '아직' 떠나지 않은 이유는요. 언제부턴가. 책이 사물일 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저라는 존재와 매우 대등한 다른 존재로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책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삶에 머무는 이유와도 닮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동료들의 책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책에 제 자신을 투영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이 제 자신은 아니라고 믿고요. 책은 나를, 내 삶을 수정할 기회를 주기도 하죠. 따라서 책과 일치하는 순간도 분명 존재했고, 존재할 듯합니다. 동시에 책을 매개로. 제가 다른 인간 존재와 일치하는 순간도 아주 매력적이었죠. 이것은 바깥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제도 밖일 수도 있지만. 제 자신의 바깥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설령 제 이야기를 쓴 책이 있더라도, 그것은 제 자신이 아니며. 차라리 새로운 자신일 듯해요. 그렇게 삶을 갱신하는 일이 책을 매개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삶이든지요. 사실 돌이켜 보면. 제가 '제 자신의 것이 아닌 문제', 혹은 제도의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실천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따라서 독일로 환경을 옮기는 선택이 더욱 소극적으로 되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정치적인 방식으로 직접 개입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기에.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해결의 방법에 있어서, 공간의 변화는 큰 영향이 없을 듯합니다. 그, 아래 쌓인 글들이 너무 혼란스러운데, 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될까요? 안녕히. 어디서 말이죠? 귀하게 아카이브하겠습니다. 또 다른 제도를 방지하는 일도 좋겠지만. 권력이 그러하듯이. 지금 제 자신도 지금 이 순간, 어떤 형태의 제도로 기능하고 있음을. 우선 인정하고 싶습니다. 검열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네 맞습니다. 다만 저는 더 편리한 제도를 원하는 것 같고. 더 영리한 제도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제도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고. 왜냐하면 저는 일차적으로 제 자신을 돕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제도가 생길지, 제가 그 제도가 되게 될지는 크게 걱정한 적 없습니다. 그럼 다시. 제가 생각하는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책을 폭발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만드는 모든 책이 각자의 방식으로 폭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 폭발이, 지금 시점에서 사용하기 조심스러운 단어이긴 하지만, 만발하는 아름다움이길 원합니다. 그 아름다움에 어떤 기술적이거나 조형적인 화려함이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지닌 아름다움의 감각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그런 아름다움이 저와 제 동료의 책에서 탄생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저는 제 동료의 책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상한 문장이네요 잠시만요. 책마다 그 책을 바라보는 고유한 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관점을 획득하려면, 자세히 보아야 하고요. 새롭게 보아야 하고. 씻은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든 만들어지는 책은 처음 태어난 책이니. 처음 태어난 듯이 대하면 좋겠죠. 이런 식의 관심과 문화가 아름다움의 폭발을 가시화합니다. 하지만 어떤 관심이나 문화의 부재로 인해서 가시화되지 않은 아름다움도. 여전히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저는 책으로 그 아름다움에 관여하고자 합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발행한 책들은 눈에 띄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아름다워 보여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허용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선택들에서도 어떤 정치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일반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에도, 분명 정치적 맥락이 작용하기 때문이죠. 문제는 제가 그런 선택과 맥락을 꽁꽁 숨겨두어서. 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금세 잊어버립니다. 멈춰주세요. 쾅: •´¨.¸. ¸. ´. ¨ ¸.´¨ ¸. .•¸´. ¨ .¸¨*.. 검열에 반대한다. 멈추세요. 이방인처럼 보였어요. 갠짜나. 안보죠? 언제나요. 그래서 강력하죠. 외국에 있는 신승민도 이방인일거에요. 그래서 자연스러워요. 제도는 나쁜 게 아니에요. 편리하잖아요. 제도를 놀이의 규칙쯤으로 보면 어떨까요. 저는 제도입니다. 이거 다 낭독될 것 같아서. 검열 한 번 더 했어요.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조는 일도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좋은 글쓰기를 희망했는데. 좋은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승민은 제도다. 반입자 말고 검열자. 졸리면 뒤에 나가 서있기 예로 다시 돌아와서. 반입자에서 두 가지 명조체가 쓰였는데. 사실 구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비슷해서요. 그런데 그 선택을 할 때는 확신에 차 있었는데, 지금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납니다. 만일 제가 소박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고집한다면, 순진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렇게 한다면. 정말 제가 갖고 있는 제도 바깥에 대한 열정이 퇴색되게 될까요? 왜냐하면, 보통 제도 바깥을 지향한다고 하면 기대하게 되거나 수반하게 되는 종류의 보다 실천적인 일들이 존재하니까요. '제도'라는 단어 말인가요? 좋습니다. 그러시죠. 어떤 단어가 있을지 궁금한데. 그런데 만일 제도 대신 규칙이라는 말을 채택하면. 규칙의 바깥은 상상하기 어려워지지 않나요? 선점된 곳도 바깥일까요? 묻게 됩니다. 여기서 바깥이 어디일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지금 이야기되는 바깥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디인지 생각해보며 마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전기적 글쓰기. 로 시작한 글쓰기에서. 바깥이 왜 등장했는지도 중요해보입니다. 앞서 말한 실패의 감각이. 제가 스스로 부여한 실패만은 아닙니다. 물론 제가 어디에 뭐를 넣고 적극적으로 응모하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이뤄지는 일련의 평가들, 그리고 그 평가의 결과들을 보았을 때. 제가 생각하는 좋음이 주어진 좋음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 좋음이 가능할지 조금 의문이지만. 그럼 승민의 좋음은 제도 바깥의 좋음인 거 같아요.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좋음의 기준으로 판단 체계를 재편성하지 않고서는. 제가 제 자신이나 제 행보, 말, 제작물 등을 좋아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실패의 감각은. 외부에서 부여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바깥이 '요청'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런 의미에서 제도 '안'이란. 제 개인적인 경험들의 구성물이자. 상징인 듯합니다. 각자의 꿈에 나오는 괴물처럼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두려움의 대상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조금은 반영되기 때문에. 제가 구성한 제도의 안과 밖이란. 제 자신의 안과 밖과 겹칠 수도 있겠습니다. 결론을 이야기하기에는. 서론과 본론이 부재하지만. 저는 익숙한 길이 무섭고. 낯선 길이 늘 편했던 것 같습니다. 낯선 길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순간 벗어나야 했고요. 그것은 제 착각이었습니다. 제가 익숙해졌다고 느꼈지만. 그 길은 여전히 낯선 것이었고. 머물 만한 이유가 충분한 길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책이 놓인 길 위에 있으니. 이 길이 계속 낯설길 바랍니다. 바깥은 실제하는 공간인가요? 오히려 요청되는 공간으로만 느껴져요. 넹. 아, 마치 신의 존재가 요청될 수 있어도 그것이 실재를 보장하진 않는 것처럼요? 규칙의 바깥은 다른 규칙 아닐까용. 그럼 다른 단어로 규정하면 되죠. 제도의 바깥을 누가 선점했다면, 어떤 공간을 전기가 성공을 바탕으론 글쓰기이기에? 저는 주의력 결핍 장애가 있어요. 검열. 규칙을 재접합하려면. 그런데 여기서 재접합이라는 말이 조금 낯선데. 다시 이어붙이는 것이겠죠. 얽힌 안과 밖을 떼어내서. 바깥을 펼친다는 뜻일까요? 저는 감각적인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규칙의 접합 구조에 대한 이론적이거나 합리적인 설득도 좋지만. 이미 그런 규칙을 내재화한 결과물을, 아마도 새로운 감각을 제공해줄 그 결과물을 동료들과 독자들에게 선보였을 때. 그것이 충분히 좋을 때. 비로소 규칙의 재접합에 대한 말 없는 동의가 이뤄질 것 같습니다. 서로를 위해 좋은 경험들을 생산할 수 있길 바라며. 그의 즐거움 만한 즐거움이 없어서. 그 웃음이나 미소 따위를 상상하며 무언가 짓는 일이 각자의 중심을 차지하길 바라며. 베를린으로 갑니다. 좋은 소식을 가지러요.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딱 세 번요. ㅃㅇ. 가지마요 승민상...... 코케인은 누구랑 갑니까... ㅠ.ㅜ 구텐탁. 빠이. J'ai perdu tous les mots. 끊임 없이 낯선 것을 찾는 것 대단해